감리꾼
휴식
이완
의 날

글 · gamniggun

사무실엔 햇빛이 전혀 들지 않고 창문도 하나뿐이라 공기가 들고나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히 식물들이 많았다. 누군가 두고 간 유기 식물들이 있어서 나는 그 중 하나를 내 책상에 들였다. 테이블야자였다. 야자라는 이름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게, 그러나 테이블이라는 이름과는 너무 잘 어울리게 형광등뿐인 실내에서도 아주 잘 자랐다. 흙도 새로 채워주고 영양제도 꽂아주었더니 금세 새 잎을 여러 개 밀어 올렸다. 그를 돌보면서 나도 반음지, 아니 음지의 좁은 책상에 점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뇌와 근육, 심지어 소화기관까지 사무실 생활에 맞춰졌다.

언젠가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다. 진심을 다하지 않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나쁘지 않을 수준으로만, 적당한 선까지만 하고 마음을 접었다. 애초에 마음을 적게 꺼내놓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불만족스럽고 불행해지는 데도 그랬다. 재미를 느끼는 일이 점점 사라졌다. 황홀함을 느끼는 순간도. 눈이 멀고 귀가 머는 느낌이 하루하루 깊어갔다. 활자를 종일 대하는데 어쩜 세계에 대해서는 점점 까막눈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한번은 직장동료가 내게 “gamniggun씨는 싫어하는 게 많은 것 같아요”라는 말을 했다. 회사생활에 대한 불만과 권력을 쉽게 가져가는 남성들에 대한 분노를 점심식사 테이블 위로 마구 쏟아내던 참이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이게 아닌데, 나 좋아하는 것 많은데. 나 식물도 좋아하고, 수영도 좋아하고, 지금 파주의 개천에서 헤엄치고 있는 오리도 좋아하는데.

파주의 오리.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한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해서도 일터에서의 일을 질질 끌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부끄럽고 안쓰러웠다.


사무실 입구엔 커다란 화분에 심겨 있는 키 큰 테이블야자가 한 그루 더 있다. 그는 거의 죽은 것처럼 보인다. 사물에 가까운 상태다. 아마 최소한의 대사를 할 수 있게 조건을 맞추고 있는 것일 테다. 그걸 견딘다고 불러야 할까, 기다린다고 불러야 할까? 어쨌거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테이블야자는 길고 단단한 창 같은 잎대를 밀어 올릴 것이다.


어제는 동료들과 회사 뒤뜰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쉬었다.

감리꾼과 독립편집꾼. ⓒ재계약꾼
처음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해보는 일이었다. 뒤뜰엔 4층 높이의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서 있다. 이제 설핏 단풍이 들기 시작한 메타세쿼이아는 이따금 씨앗 주머니를 떨궜다. 햇살도 바람도 좋은 날이었다. 바람이 불어 온갖 나무들을 뒤흔들 때 나는 깊은 물 속으로 뛰어드는 상상을 한다. 혹은 세상의 모든 잎들이 내 몸 안을 한꺼번에 통과하는 상상. 그렇게 내 몸이 잎과 함께 흩어져 사라지는 상상.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다른 공기, 다른 기압, 다른 호흡을 필요로 하는 세계로 간다.


2020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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