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꾼 단상

색인의 쓸모

글 · gamniggun
2020년 5월 20일

……나는 1년 차 색인꾼이다. 200쪽부터 1300쪽까지 다양한 볼륨의, 다양한 분야의 책들의 색인을 만들어왔다. 담당 편집자 몰래 수백 개 이상 걸리는 단어를 뺀 적은 있었지만 비교적 성실하게 색인을 패왔다. (색인 목록에서 단어를 몰래 뺀 것은 『노자』에서 ‘노자’, 혹은 『일본 제국 패망사』에서 ‘천황’을 빼는 정도의 아주 합리적인 처사였음을 밝혀둔다.)

……색인 만들기는 ctrl+F와 엔터, 숫자 키를 오가는 아주 지난하고 지루한 작업으로 흔히 손목 터널 증후군을 동반한다. 방치할 시 어깨와 목 통증으로 이어지며,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른다(아님). 손목 통증에 시달리다 보면 56, 58, 59쪽에 걸쳐 나오는 단어를 56, 58~59가 아닌 56~59으로 써버리고 싶은 유혹, 보다 근원적으로 색인 목록을 절반으로 줄여버리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그 유혹을 모두 뿌리치는 장인 정신만이 온전한 색인을 탄생시킬 수 있다.

……색인은 지난하고 지루한 작업이지만 또 단순 작업만은 아닌 것이 루스벨트(시어도어)와 루스벨트(프랭클린), 아베(노부유키)와 아베(신조)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것은 ‘테쿠스’, ‘오스트랄’, ‘스트랄’ 등으로도 검색해야 행갈이가 된 단어들까지도 잡을 수 있다. 거꾸로 ‘인도India’ 같은 짧은 단어는 ‘한국인도’ 같은 것도 함께 걸리기 때문에, 하나하나 확인해서 제외해야 한다. 또한 표기법 통일이 안 되었거나 오타가 나서 걸리지 않는 것이 없도록 가능한 한 찾아내 바로잡아야 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색인 기계가 왜 없는지에 대한 그럴 듯한 이유들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기계가 일단 초벌 작업을 해주고 인간인 내가 검수하는 게 훨씬 낫지 않나 싶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색인을 만들 때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은 ‘이걸 연구자 빼고 누가 보냐’ 인데, 옆 동네의 편집자가 본다. 그걸 오늘 알았다. 바로 쪽수 표기가 누락된 인용문의 출처를 찾는 불쌍한 편집자 말이다. 다행히 그 불쌍한 처지의 편집자는 내가 아니었고, 나는 그 편집자를 도와주는 색인꾼의 역할이었다. 동료 편집자가 찾고 있는 책의 대부분을 집에 갖고 있었던 나는 귀가 후 책장을 뒤졌다.

……먼저 난이도가 낮은 단편 소설부터 시작했다. 최애 소설가의 작품인데다, 해당 단편은 몇 번이고 읽은 것이고, 또 분량이 짧아서 금세 찾을 수 있었다.

그다음 인용문도 다행히 ‘포드주의’라는 비교적 도드라지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던 터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미셸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였는데, 500쪽이 넘는 학술서에서 별 특징이 없는 단 한 문장을 찾아내야 했다. 심지어 책 제목으로 쓰인, 그래서 아마도 책 전체에 걸쳐 무수히 등장할 ‘안전’ ‘영토’ ‘인구’가 그 문장의 키워드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색인을 펼쳐 보았다. 예상대로 ‘안전’, ‘영토’, ‘인구’는 각각 색인이 스무 개 넘게 걸려 있었다. 그 중 색인 개수가 가장 적은 ‘안전’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안전’의 첫 등장 구간은 21~33쪽에 걸쳐 있었고 나는 곧 ‘검은 것은 글자요’의 상태가 되었다. 그 다음 구간도 마찬가지였다.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색인 목록의 ‘안전’과 ‘영토’와 ‘인구’를 번갈아 보는데 순간 내게 아주 천재적인 생각이 스쳐갔다. 셋이 모두 겹치는 구간을 찾으면 되잖아? 그렇게 찾아낸 안전X영토X인간의 교집합은 31이었다. 그리고 그 문장은 31쪽에… 있었다! 세상에. 난 정말 천재 색인꾼이야.

……스스로에 대한 감탄에 젖어있자니, 이윽고 이 어마어마한 색인 목록을 포기하지 않고 완수한 편집자에게 대한 고마움이 밀려들었다. 당신은 방금 불쌍한 편집자와 그의 동료를 구원하였어요.

……색인을 구색 맞추기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조금 반성했다. 비록 그 제작 방식도 작동 방식도 조금 구시대적이지만 유용하군. 훗날 패야 할 색인이 생겼을 때, 대충 뽀개고 싶을 때, 장작 몇 개 태워버리고 모른 척 하고 싶을 때 이 날을 떠올리며 조금 더 힘을 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인용문을 애타게 찾고 있을 편집자를 생각하며 말이다.

……P.S.
어디선가, 자주 인용되는 아래 문장의 출처를 찾고 있는 편집자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그 문장 31쪽에 있어요!

……“주권은 영토의 경계 내에서 행사되고, 규율은 개인의 신체에 행사되며, 안전은 인구 전체에 행사된다고 말입니다.”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르트망 옮김, 난장,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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