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꾼 단상

머슴살이

글 · gamniggun

감리꾼은 오늘도 열심히 한국전쟁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복합명사가 아닌데 복합명사인 척 붙어있는 것들과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는 명사 '데'와 어미 '-ㄴ데'를 골라내 떼어놓기를 200페이지째 하고 있었다.
그때 ㅍ이 감리꾼을 불렀다.

-그거 언제 줄 수 있어?

오늘도 대명사로 물어봤지만 감리꾼은 태연하게 응대했다.

-한 25퍼센트 정도 됐어요...
-문장 하나하나 읽고 있는 거 아니지?

사실 감리꾼은 문장을 하나하나 읽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응대했다.

-좀더 속도 내서 해볼게요.

여기서 속도를 낸다는 건 대충하겠다는 뜻이다.
감리꾼은 아주 조금 더 속도를 내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ㄱ이 감리꾼을 불렀다.

-어, 감리꾼아. 너 지금 뭐하고 있어?
-한국전쟁 설거지 하고 있는데요.
-아 맞다. 근데 이거 장작을 좀 패줘야겠거든?

여기서 장작이라함은 색인을 말한다. 지긋지긋한 색인...
그렇다. 감리꾼의 두번째 직업은 바로 색인꾼이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손목 아파 죽겠는데...

감리꾼은 손목 치료비 산재 신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색인을 패기 시작했다. 이놈의 색인은 패도패도 손목 통증 외에는 남는 게 없다. 아직도 색인 패기 기계가 나오지 않았다니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애초에 이 머슴살이 자체가 거대한 거짓부렁이나 다름이 없다.


2020년 5월 14일


뒤로